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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김만술 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953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파주시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통일공원 내에 베티고지 전투에서 맹활약한 김만술 소위를 추모하기 위해 보병 제1사단에서 1996년 12월 4일 이 동상을 세웠다. 베티고지의 영웅인 김만술 소위는 1929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오사카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 6월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제5연대에 배속되었다. 입대 후 그는 여순 10·19사건의 진압작전과 태백산맥 등지에서 준동하던 공비토벌작전에 기관총 사수로 참전하는 등 약 6년여의 기간을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평양 탈환 작전 등 주요 전투에서 탁월한 지휘능력을 인정받아 1950년 7월 15일 특무상사에서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김만술 소위는 7월 15일 제1사단 제11연대 제2대대 제6중대 제2소대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베티고지 사수임무를 부여받았다. 7월 15일은 휴전을 앞두고 중공군이 벌인 막바지 공세인 이른바 7·13공세의 사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7·13공세는 중공군이 휴전을 앞두고 중부전선의 금성돌출부의 만곡부를 없애기 위해 퍼부은 최후의 공세였으나, 이러한 불길은 서부전선 임진강 대안의 고양대 일대와 노리고지를 감제하는 중심부인 베티고지까지 불어 닥쳤다. 그동안 베티고지 사수를 위해 대대에서는 사흘 동안 3개 소대를 투입했으나, 하룻밤만 지나고 나면 중공군의 공격에 반수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날이 새기도 전에 새로운 1개 소대를 다시 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김만술 소위가 지휘하는 제6중대 제2소대가 4번째로 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김만술 소위가 임무를 부여받았을 때 베티고지는 세 개의 봉우리 중 중앙봉과 동봉은 아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중앙봉에서 직선거리로 10m도 안되는 서봉은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1953년 7월 15일 오후 2시 김만술 소위는 아직 얼굴조차 익히지 못한 34명의 소대원들과 함께 베티고지 사수를 위해 중앙봉과 동봉(東峯)을 점령했다. 김만술 소위는 ‘목의 가시’와도 같은 서봉(西峯)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지금까지 국군이 당하고만 있던 수동적인 자세를 뒤집어 국군의 사기를 드높이는 한편, 중공군에게 매서운 맛을 보여주기 위해 중대장에게 서봉에 대한 공격을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 당시 베티고지에서는 많은 사상자로 인해 병사들은 고지에 오를 때 "오늘은 몇 명이 전사할 것인가"를 걱정하게 되었고, 상급부대도 다음에는 “어느 소대를 투입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정도로 사상자가 많아 국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특무상사로서 실전 경험이 많았던 김만술 소위는 병사들에게 먼저 “아무리 치열한 포탄 속에서도 침착하고 민첩하게만 행동하면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김만술 소위는 서봉을 기습 공격하여 적병 5명을 사살하고 8부 능선까지 공격하여 소대원들의 사기를 올린 다음 야간에 적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여 교통호의 모래를 파내고, 무선과 유선을 세밀히 점검하고, 시계를 일일이 확인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중공군의 야간공격을 받았다. 김만술 소위는 중공군 1개 대대 규모의 공격에 맞서 수류탄과 소총, 백병전 그리고 4차례의 포병 진내사격을 요청하며, 사선에서의 혈투를 벌였다. 이렇게 13시간이나 진행된 격전 속에 19번이나 뺏고 빼앗기는 접전을 치룬 결과 제2소대의 생존자는 소대장을 포함 단 12명뿐이었다. 이때 확인된 중공군의 시체만도 350여구에 달했고, 국군은 23명이 전사했다. 김만술 소위와 제2소대원은 치열한 혈투속에서 왕성한 책임감과 감투정신으로 베티고지를 몸으로 지켜냈다.
소충사
시설 : 사당
사건 연도 : 1878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관할지청 : 전북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소충사는 이석용 의병장외 28의사의 항일투쟁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순절하신 충의열사의 호국정신 계승, 임실출신의 독립유공자 묘역과 유물을 한곳에 모신 곳이다. 지의동과 동룡동에 있는 28의사의 묘소를 1988년 5월 18일 성수면 오봉리 산1번지로 임시 합장하였다가 1995년 11월 소충사를 조성하고 여기에 안장하였으며 정재 이석용장군의 묘도 전남 영암군 월출산에서 같은 해 유족들의 천묘로 28의사와 함께 소충사에 안장 되었다. 이석용 의병장과 함께 소충사에 안장된 독립유공자는 다음과 같다. 김동관·김사범·김여집·김춘화·김치삼·김학도·승려 덕홍·승려 봉수·박달천·박만화·박운서·박인완·박철규·허천석·서상열·서성일·성경삼·양경삼·여주목·윤정오·오병선·이광삼·정군삼·최덕일·최일권·한득주·한사국·허윤조 이석용은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나 17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한 출중한 인물이다. 을사조약으로 일제가 침략의 야욕을 노골화하자 성수산 골짜기의 상이암에 동지를 규합하여 1907년 8월 28일 마이산에서 「호남의병장의 동맹단」을 결성하여 의병장으로 추대 되었는데 당시 의병의 수가 5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 후 2년에 걸쳐 진안에 주둔한 왜군을 격파하고 영광, 고창, 용담 등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왜군에 당하지 못하고 1908년 4월 임실에서 크게 패하자 의병들을 해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정동석의 배반으로 1913년 일경에 체포되어 1914년 전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37세를 일기로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 3월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다.
소수 만세운동 유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충청북도 괴산군
관할지청 : 충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에서 전개된 3·1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괴산군이 세운 기념비이다. 기념비는 높이 1.5m, 너비 2.87m이며, 부지 면적은 63㎡이다. 1985년 9월에 건립하였으며, 2002년 11월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소수면의 독립만세운동은 몽촌리의 유해륜(柳海崙)과 경권중(慶權重), 송능식(宋能植) 등이 주도하였다. 항일 의식이 투철하던 유해륜과 경권중은 같은 군의 괴산면·장연면·청천면 등지에서 전개된 3·1운동에 고무되어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2일 새벽 2시경, 송능식이 앞장선 5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현리의 면사무소를 습격하기 위하여 몰려갔으나, 사전에 탐지한 일제 경찰의 무력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날 밤 8시경에 200여 명의 시위대가 길선리(吉善里)에 사는 면장 김승환(金昇煥)의 집을 습격하여 면장을 선두에 세우고 경찰주재소로 몰려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유해륜·경권중·송능식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유해륜·경권중은 징역 10월형을, 송능식은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경권중은 모진 고문을 받고 병보석되어 귀가하였으나, 얼마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후에 경권중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유해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송능식에게는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소래 김중건 선생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9년
주제 : 해외운동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김중건(金中建, 1889~1933)은 함남 영흥 사람으로 1908년 고향에서 연명(鍊明)학교를 설립하여 교육활동을 하였으며, 1913년 만주로 건너가 건원학교·도전학교·덕수학원·쟈피구학원·이도구학원·팔포강학원 등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힘썼다. 1920년 11월에는 만주 안도현에서 대진단(大震團)이라는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여 활약하였으며, 1928년 이후에는 만주지역 동포사회에서 조선민사(朝鮮民社)·농우동맹(農友同盟)·진우회(震友會) 등을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3월 그를 시기하던 공산주의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소래김중건기념사업회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83년 10월 16일 이 비를 세웠다.
소난지도항쟁추모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09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관할지청 : 충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06년 4월 최구현(1866~1906)은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진 36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당진군 소난지도(小蘭芝島)로 들어가 의병활동을 지속하였다. 이때 소난지도에는 이미 당진의병과 화성창의장 홍일초 휘하의 군사 등 40여 명이 있었고 이어서 서산의병의 참모 김태순이 거느린 의병 28명과 차상길이 거느린 홍주의병 15명이 합류하여 총 120여 명의 의병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들은 장기적인 항일전을 벌이고자 간도로 가기 위해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1906년 7월 5일 새벽에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100여 의병들이 전사하고 주모자들은 체포되고 말았다. 당진군청은 2009년 3월 13일 당진군 석문면 난지도리 373-7에 소난지도 항쟁 추모탑을 건립하여 소난지도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하거나 옥고를 치른 선열들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렸다.
속초시 6·25 및 월남전 참전기녑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및 월남전쟁
지역 : 강원도 속초시
관할지청 : 강원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6.25전쟁과 월남참전의 역사적 의의와 참뜻을 널리 알려 호국정신을 계승하고 속초시 출신 참전용사들의 투혼과 희생, 상흔의 족적이 각인된 애국애족 정신과 장렬히 산화한 용사들의 넋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손병희 집 터
시설 : 사적지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할지청 : 서울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곳은 1919년 2월 28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모여 의견을 나눈 곳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3인은 3·1운동 거사 전날인 1919년 2월 28일 서로 지면을 익히고 다음 날 독립선언식 절차를 최종 점검하기 위해 가회동 손병희의 집에 모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 장소인 탑골공원에 학생들이 집합하기로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만일의 사태를 우려해 급히 선언식 장소를 인사동 명월관 지점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이 변경사실이 학생단 측에 전달되지 않아 인해 거사 당일 일정에 다소의 혼선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손원일 제독 동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관할지청 : 경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해군 창설을 위해 힘쓴 故손원일 제독은 초대 사관학교장,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하고 한국전쟁 기간 중에는 국군의 최선임 지휘관으로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의 선봉에 섰으며, 평생을 국가와 해군을 위해 봉직하였던 숭고한 정신과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송재 서재필선생 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866년
주제 : 문화운동
지역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관할지청 : 서울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서재필(徐載弼, 1866~1951)은 1884년 12월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다. 1895년 12월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고, 1896년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으며, 국내 동지들과 함께 7월 2일 독립협회를 설립하여 국민 계몽운동에 힘썼다. 이러한 활동이 수구파 정부의 미움을 사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1919년 3·1독립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1919년 8월 구미위원부 고문으로 추대되고, 1921년 4월 위원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는 1947년 7월 미군정 고문으로 귀국하여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9월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서거했다. 한국신문협회가 주축이 된 송재서재필선생동상건립위원회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1990년 4월 7일 이 동상을 세웠다.
송병선선생 순국지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905년
주제 : 한말구국운동
지역 : 대전광역시 동구
관할지청 : 대전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송병선은 충청남도 회덕에서 태어났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과 경연관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5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에게 인치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5적의 처형과 을사조약의 파기 및 의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그의 공훈을 기렸으며, 충남 대전에는 고종의 건사지명으로 건립된 문충사가 있어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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