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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60
송와 박영관 선생 생가 및 공적비
시설 : 생가
사건 연도 : 1926년
주제 : 기타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관할지청 : 전북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28년 이리 동척 습격계획에 참가하여 군자금 모금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고창 출신 애국지사이다. (1926년 음 5월 28일 오석완으로부터 권총 및 탄환을 보관의뢰받고 1928년 음 4월까지 보관하고 군자금 모집계획을 세우다가 일경에 피체 1930년 3월12일 전주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외 2종목의 죄목으로 1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송진우 고택
시설 : 생가
사건 연도 : 1890년
주제 : 민족주의운동
지역 : 전라남도 담양군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송진우는 1890년 5월 8일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의병장 기삼연에게서 유학을 배우고, 을미사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항일정신을 갖추어 갔다. 1908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0년 4월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그 해 8월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스승이었던 기삼연이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피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노한 송진우는 방황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남은 공부를 마치고, 독립을 위한 실력배양의 길을 걷기로 하였다. 1908년 일본으로 유학 중 송진우는 한인 유학생 단체에서 활동하였고 그 후 중앙학교에서 교육운동을 펼치다가 동아일보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1936년 동아일보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손수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40년 이후 창씨개명과 학도병 권유 유세를 거부하고 태평양전쟁의 전황을 파악하여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려주었다. 이로 인하여 일제의 엄중한 감시를 받고, 은신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해방 직후 해방정국을 이끌면서 민주국가 건국 노력에 앞장섰다. 그러나 1945년 12월 27일의 모스크바 3상 회의 신탁통치 찬반 문제를 놓고 신중론의 입장을 펼쳤다가 찬탁론자로 몰려 12월 30일 새벽 6시경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등 5인의 총격을 받고 피살됐다. 송진우의 독립정신과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09년 담양현지의 생가가 복원되었다. 한편 이곳은 한말 의병장 기삼연(1851~1908)이 을미사변 이후 1896년 2월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조정의 해산조치에 저항하다가 체포된 후 평리원에 이감 중 탈출하여 은거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의병장이며 성리학자였던 기삼연은 송진우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후일의 의병활동을 구상하여 호남의병을 일으켰다.
송산지역 3·1운동 기념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기도 화성시
관할지청 : 경기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화성시는 2008년 2월 19일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558-4 송산3·1기념공원내에 송산지역 3·1운동 기념탑을 건립하여 송산지역 3·1운동에 참여한 순국선열 및 면민들의 공적과 그 숭고한 정신을 기렸다. 탑 주변에는 분향대를 비롯해 순국선열 42인의 이름을 새긴 기록벽과 송산 3.1운동 약사를 기록한 기록벽을 세웠으며 답 둘레에는 4개의 팔각형 조명등을 세웠다. 1919년 3월 26일 송산면사무소에서 200여 명으로 시작한 만세운동은 3월 27일 400여 명이 참가하는 서신면 지역의 만세운동으로 이어졌으며 28일 사강 장날을 맞아 군중 2천여 명의 시위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경 노구치의 강경한 진압에 성난 군중들은 주재소를 포위하고 도망가는 노구치에게 달려들어 돌과 몽둥이로 때려 사망하게 한다. 원래 송산지역은 일제에 의해 해안일대의 농경지, 염전 간척에 무자비한 인력을 동원 당했고 식량과 소금의 가중한 수탈로 일제에 대한 원한이 특히 깊었던 곳이다. 이것이 조직적이고 공세적인 과감한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원인이 되었고 발안만세 운동, 화수리 주재소 습격 방화와 일경 가와바다 처단으로 이어졌다.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6·25참전유공자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관할지청 : 서울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6.25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바치신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후학들에게 보훈정신을 계승하고자 건립하였다.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총동문회가 중심이 돼 '6.25전쟁에 참전하신 분들의 살신성인과 군인 정신을 널리 알리자'는 뜻에서 명비를 건립하였다.
수도탈환부대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강원도 인제군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인천상륙작전과 수도탈환의 위업을 계승하기 위해 후배장병의 정성을 모아 기념비를 세웠다.
수원시 참전유공자 공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0년
주제 : 6·25전쟁 및 월남전쟁
지역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관할지청 : 경기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수원시 인계동 예술공원 내 분수광장 옆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수원시 참전유공자 공적비’를 건립했다. 수원시는 이곳 출신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충정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5년 9월 28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수원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낙동강 전투의 최후방어선을 비롯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수원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수원삼일학교 학생운동지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920년
주제 : 학생운동
지역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관할지청 : 경기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관련사건: 1920 구국민단사건/1917 삼일학교 동맹휴학 관련인물: 이득수, 최문순, 이선경, 차인재, 박선태, 임순남 혈복단(血復團)에서 비밀결사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학생 이득수(일명 이종상)은 임순남·최문순·이선경 등과 함께 혈복단을(血復團) 구국민단(救國民團)으로 개칭하였다. 1920년 7월경부터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독립신문을 비롯해 창가집 등을 서울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입수하여 수차례 민가에 배포하였으며 삼일학교에서 비밀회합을 하였다. 한편 수원 삼일학교 5·6학년 학생80여명은 1927년 11월 4일 학교에서 사직시킨 4명의 교사 복직과 교무주임 김용각(金龍珏)의 사직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수당이남규선생순절의땅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878년
주제 : 한말구국운동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관할지청 : 충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수당 이남규선생은 고려말 목은 선생의 후예로 1855년 서울 미동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 벼슬은 궁내부 특진관에 올랐다. 일제의 침낮 마수가 이땅을 죄어들자 일찍이 척왜 항일의 굳은 신념을 불태워온 수당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영흥부사직을 박차고 왜적을 물리칠 것과 척신의 머리를 베라는 추상같은 상소와 실제의 행동은 당대의 추앙을 받았다. 1906년 의병들의 홍주성 봉기를 뒤에서 후원하고 의병장 민종식을 숨겨준 일로 왜군에 의해 공주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07년 9월 26일 선생을 두고는 그들의 침략이 뜻과 같지 않을 것임을 안 백여 명의 왜군은 이곳에서 20여리 떨어진 대술면 상항리 선생의 사저 평원정을 에워싸고 묶으려 했다. 선생은 이에 ˝선비는 죽을 수 있으되, 욕된 일은 당하지 않으리라˝하고 외치며 가마를 타고 나섰다. 해가 지기를 바라며 뒤따르던 왜적들이 이속 평촌 냇가에 이르러 선생을 마지막으로 회유하자 ˝죽을 수는 있어도 너희에게 굽히지 않겠다.˝는 선생의 호령이 떨어지자 저녁놀에 반짝이는 칼을 높이 쳐들었다. 뒤따르던 맏아들 충구가 몸으로 선생을 감싸자 내리친 칼에 쓰러지니 가마를 맨 하인 김응길, 가수복이 또 선생을 에워싸는 순간 칼날이 어지러이 비켜 아들도, 하인도, 선생도 모두 쓰러지니 향년 쉰 셋이었다.
수당이남규선생고택및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637년
주제 : 한말구국운동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관할지청 : 충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조선시대 1637년 건립된 수당 이남규 선생 고택은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가 태어난 곳으로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에 위치해 있으며 1976년 충남유형문화재 68호로 지정됐다. 건물은 냠향으로 ㄷ자형의 안채와 一자형 행랑채가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사랑채가 별도로 있다. 안채는 정면 중앙 7칸과 측면 6칸으로, 중앙 3칸은 대청으로, 대청의 우측의 안방과 1칸의 윗방, 그리고 반칸 씩의 고방을 각각 갖고 있다. 대청 좌측에는 마루방과 건넌방이 1칸씩 있고, 이어서 부엌 2칸이 연결되어 있으며, 대청 서쪽 끝에 1칸 반을 우무물마루로 하여 사당공간을 두었다. 안채 앞에 있는 一자형의 행랑채는 2칸의 중문을 중심으로 동측 3칸에는 헛간이, 서측 2칸은 청지기방이다. 안채와 서측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一자형 평면으로, 대청 좌측에는 작은 사랑방 1칸, 우측에는 큰사랑방 2칸이 있다. 이남규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4대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과거 급제 후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해 홍문관 교리, 승정원 동부승지, 우승지, 공조참의, 형조참의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는 이를 규탄하는 "청절왜소(請絶倭疏)", 을사늑약 때는 "청토적소(請討賊疏)" 등의 상소문을 써서 일제의 만행을 온 나라에 알려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그가 1906년 5월 전 참판(參判) 민종식(閔宗植)이 충남 홍산(鴻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공방전 끝에 패하여 피신한 민종식 의병장을 이곳 평원정(平遠亭)에 숨겨 주었다가 부일 주구배가 그 사실을 일본군에게 밀고하여 선생과 장남 충구(忠求)가 붙잡혀 공주감옥에서 혹독한 형벌을 당한 끝에 한 달만에 풀려났다. 그후 일제는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光武皇帝)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케 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자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특히 해산 군인들의 참여로 의병운동이 더욱 거세게 일어나자 이 지역의 의병재발을 우려한 일본군은 1907년 9월 26일 선생을 붙잡아 압송하던 중 충남 아사군(牙山郡) 송악면(松岳面) 평촌리(坪村里) 냇가에 이르러 협박과 회유를 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조금도 뜻을 굽힐 기색을 보이지 않자 칼로 선생을 죽이고, 온 몸으로 이를 막으려던 맏아들 충구와 하인 김응길(金應吉)이 함께 피살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수복기념탑(포천시)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54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포천시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포천시는 1955년 1월 포천군 영북면 자일리 509-1에 수복기념탑을 건립하여 북한군의 마수에서 포천지역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고 북한군을 몰아내는데 전력을 다한 육군 5군단장 최영희 장군과 그 예하 장병의 전공을 널리 선양하고자 하였다. 포천지역은 개전 초부터 1951년 3월까지 2차례 북한군이 점령했다가 1951년 3월 24일 유엔군과 우리 육군의 반격작전으로 완전히 수복하게 됐다. 이후 도로가 확,포장됨에 따라 현 위치로 이전하여 보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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