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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우선생 다전 기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46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관할지청 : 경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다전마을 주민이 1890년 11월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2231(다전마을회관 앞)에 면우 곽종석 선생(1846~1919)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다전기적비를 건립하였다. 다전마을은 선생이 51세때부터 이곳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고 옥고를 치른 후 돌아와 영면한 곳이다. 파리장서는 면우 곽종석 선생이 기초하여 선생과 전국의 유림 136명이 1919년 11월 열린 파리평화회의에서 세계만방에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연명으로 작성한 독립청원서이다. 파리장서는 “오(吾) 한국도 천하만방의 하나로서 지역이 3천리, 인민이 2천만이요 또 4천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명국임은 온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고 강조, 독립의 당위성을 천명하고 있다. 면우 선생은 일경들의 삼엄한 경비를 피하기 위해 파리로 가는 김창숙에게 장서를 외우게 하고 가는 붓으로 다시 써 미투리(짚신)를 삼아 당시 우리나라 대표로 파리에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에게 전달했다. 김규식은 이를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하고 독어 불어 영어로 번역, 세계 각국의 언론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 발송해 국제여론을 크게 환기시켰다.
모암 장희수 애국지사 항일 기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2004년
주제 : 한말구국운동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서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모덕사
시설 : 사당
사건 연도 : 1833년
주제 : 사회운동
지역 : 충청남도 청양군
관할지청 : 충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조선 후기 애국지사인 면암 최익현의 영정을 모신 사우로 1914년에 건립되었다. 현판의 글자는 고종황제가 내린 글 가운데 "면암의 덕을 흠모한다" 라는 구절에서 "모(慕)"자와 "덕(德)"자를 취한 것이다. 최익현은 이행노의 제자로 문학과 도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철종 6년(1855)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사헌부 장령까지 올랐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며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여러 차례 올리고 흑산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또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고 같은 해 일본의 죄상을 16개 항목에 적어 항쟁하며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나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적군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하다 끝내 순국하였다. 후에 그를 추모하는 사림들이 태인, 포천, 곡성 등 여러 지역에 그의 사당을 세웠다. 모덕사는 최익현이 살았던 고택 옆에 마련된 사우와 많은 장서를 보존하고 있는 장서각과 그의 유물을 전시하는 전시관이 함께 들어서 있다.
모충사
시설 : 사당
사건 연도 : 1991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전라남도 보성군
관할지청 : 전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모충사에는 항일 의병의 거목인 최익현을 비롯한 호남지역 출신 애국지사 백홍인(‘90년 애족장)과 박태환(’91년 애국장), 창의사인 위계룡과 백형칠 등 독립운동가 5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최익현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을사조약에 저항한 의병장이다. 김기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를 비판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반대에서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상소를 올린 뒤부터는 개항 반대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고, 을사 보호 조약 이후로는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 당일,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대한 항의의 단식을 하다가 순국하였다. 백홍인은 전라남도 보성 출신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운을 걱정하여 의병운동에 동조하고 있었다. 면암 의진에 들어가 적군과 약간의 교전을 하였다.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이에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2천만 동포가 왜놈들의 밥이 되는 것을 어찌 보고만 있겠느냐" 고 하며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체포되기도 하였다. 위계룡은 전남 장흥 사람이다. 최익현선생의 소명에 응하여 호남창의에 좌중군장으로 참여하였다. 박태환은 전남 보성 사람이다. 1909년 3월 8일 전남지방의 의병장 박민홍의 우익장으로 총기로 무장한 40∼5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전남 각지에서 활동하다가 남평 거성동 전투에서 왜적과 교전 중에 전사 순국하였다. 백형칠은 전남 보성 사람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백홍인 등과 함께 결사구국 할 것을 혈맹하고, 경고서사(敬告書社)를 호남 각지에 배포하였다. 또한 1908년 백홍인 등 여러 장수들과 보성, 장흥 등지에서 계속 항전하다가 군자금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였다. 1910년 순절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919년 3.1운동시 귀향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려 하였으나 귀향 즉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투옥되어 3개월만에 석방되었다. 그 후 망극의 한을 품은 채 1937년 타계하였다.
모도 항일운동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23년
주제 : 사회운동
지역 : 전라남도 완도군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전남 완도군 청산면 모도리에서 1923년 9월 청년들이 배달청년회(1925년 모도청년회로 개칭)를 조직하여, 개량서당을 후원하며, 서당 학동들과 주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항일 활동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서재만(徐在萬, 1904~1984), 장석칠(張石七, 1905~1952), 정두실(鄭斗實, 1900~1961), 천병섭(千柄燮, 1899~1949), 천홍태(千洪泰, 1903~1927), 최창규(崔昌奎, 1905~1966)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완도군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2년 1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목천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관할지청 : 충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19년 3월 14일 오후 4시 무렵 천안군 목천읍에 있는 목천보통학교에 다니는 학생 약 120명[목천 기미 독립 만세 운동 기념사업회에서는 171명으로 계산]이 교정에 모여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목천읍 읍내로 진출하여 일본 헌병대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 시위를 앞장서서 이끈 인물로 네 명이 체포되었는데,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전하여 오는 기록이 없다. 당시 목천 보통학교 학생들의 나이는 13~23세 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순식간에 각지로 파급 확산되어 4월 1일은 호서지방 최대의 항일투쟁 의거인 아우내 만세운동으로 이어졌으니 이곳 목천 학생의거는 바로 천안지방에서 최초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으로서 주동학생 4명이 체포·구금된 중대한 사건이었다. 목천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는 1919년 충남 천안시 목천면 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설립한 것으로 1989년 3월 14일에 목천초등학교 운동장 동쪽에 높이 3.5m의 목천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목산 조현욱선생 순국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54년
주제 : 3·1운동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조현욱은 호는 목산이고 본관은 함안, 경상북도 청송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6일에 청송군 현서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있던 와중에 조현욱은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인근 마을의 신태휴‧조병국 등에게 격문을 보내서 동참하기를 권유하였다. 이후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하고, 주민을 규합하면서 시위를 준비하였다. 거사 당일 주민을 선도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계속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고등법원으로 이송되어 5월 31일에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 조국의 현실에 통탄해 하며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1독립만세운동의 청송군 주동자로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조현욱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웠다.
목포시 현충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2007년
주제 : 기타
지역 : 전라남도 목포시
관할지청 : 전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목포시 현충탑은 기존 현충탑이 유달산 중턱 고지대에 위치해 현충일 등 각종 행사 시 상이군경 및 고령 보훈가족들이 참배하기 불편하여 재건립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교통이 편리하고 장소가 넓어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목포시 옥암동 근린공원 내에 2007년 2월 14일 부지 4,950m²에 새로 건립한 탑이다. 매년 전라남도 현충일 추념식과 함께 각종 국경일 참배 및 추모행사가 실시되고 있으며, 자라나는 청소년 및 시민들에게 호국정신 함양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목포 양동교회 3.1운동 만세시위지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라남도 목포시
관할지청 : 전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19년 4월 8일 목포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계획한 장소이자 3.1운동을 이끌었던 곳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지역 유지였던 양동교회 교인들은 영흥학교, 정명여학교의 교사.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전단을 준비하고 목포상업학교와 목포공립보통학교 학생들도 동원하기로 임무를 분담한 뒤, 목포 곳곳에서 동싲시다발적 시위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1919년 4월 8일 양동교회 교인들은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앞장섰으나 일제 경찰에 붙잡혀 많은 시련을 겪었다.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년
주제 : 애국계몽운동
지역 : 경기도 양평군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골에서 출생하여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고 1918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1919년에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일본과 국내에 신한청년당 당원들을 파견하고 자신은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가서 그 지역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전민족적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이후 1929년 상하이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가 1930년 징역 3년 판결을 받고 1932년까지 서대문 형무소와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4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며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지만 해방 후 1947년 7월 19일 권총 피격으로 혜화동 로터리에서 62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생가는 여운형이 1886년 출생해서 부친 탈상을 끝낸 뒤 서울로 이사 간 1908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생가는 6·25전쟁 중에 소실되었지만 2001년 양평 군민들의 노력으로 생가 터가 정비되고 이듬해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그 후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것을 계기로 서거 64주년인 2011년에 생가가 복원되었고 2011년 11월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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