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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60
백운산지구 전몰장병 위령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3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전라남도 광양시
관할지청 : 전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백운산지구 전몰장병 위령비는 1953년 백운산 지구 공비소탕작전 중 전사한 허정수 소령 이하 총 44명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위령비로서 1953년 9월에 백운산지구에 참전한 육군 870부대(제11경비대) 전우회 31명이 전남 광양시 옥룡면 산남리 산본마을에 건립하였다. 이후 2002년 11월 1일 위령비를 개축하고 주위 공간을 새롭게 단장했다. 이 위령비는 여순사건의 아픔과 6·25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중요한 현장으로 안보교육과 통일교육을 위한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백범광장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876년
주제 : 해외운동
지역 : 인천광역시 남동구
관할지청 : 인천보훈지청
시설내용 : 김구 선생이 1896년 ‘치하포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일 새벽 해주감옥으로 붙잡혀간 후 7월초 인천감옥으로 이감되었다. 8~9월에 걸쳐 모두 세 차례 신문을 마치고 수감 중이던 김구 선생은 1898년 3월 탈옥할 때까지 2년 가까이 감옥생활을 하였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1898년 3월 9일 인천감리서 감옥을 탈옥하였으며 당시 인천의 지리를 잘 모르는 상태였지만 용동마루턱, 천주교당 뾰족집, 화개동 마루턱, 북성고지 모래밭, 부평 등의 지명을 통해 자신의 탈옥 경로를 남겼다. 김구 선생은 1911년 안명근 사건과 신민회 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두 번째로 인천감옥에 투옥되었다. 당시 선생은 감옥에 있으면서 인천 축항공사(인천항 제1부두)에 동원 돼 노역에 시달리다 1915년 가출옥을 하였다. 김구 선생은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와 1946년 지방순회를 할 때 인천을 제일 먼저 찾았으며 인천시에서는 김구 선생과 그의 어머니의 겨레 사랑을 위한 헌신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 1997년 10월 27일 인천대공원 내에 김구 선생과 그의 어머니 동상을 세우고 백범광장을 조성하였다.
백일교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1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강원도 강릉시
관할지청 : 강원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동덕리에 김백일 장군의 3·8선 최초 돌파를 기념하기 위해 다리를 건설하여 그의 이름을 붙였고 육군 제1607부대에서 2002년 6월 20일 이 비를 세웠다. 김백일 장군은 그 일가의 고향이 함경북도 명천이나, 조부(김영학, 독립투사)가 한·일합방 후 북간도 연길현으로 이주함에 따라, 1917년1월30일 북간도 연길현 국자가에서 태어났다. 국자가 소학교와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 1년을 마친 후 서울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 봉천군관학교를 졸업, 만주군 중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해방을 맞았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함께 육군 부위(중위)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1946년 2월 26일 전라북도 이리에서 제3연대를 창설하여 초대연대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대령 계급으로 특별부대 사령관을 역임하고, 1948년 10월 여·순 10·19사건이 일어나자 제5여단장으로 임명되어, 순천에 이어 여수를 탈환함으로서 진압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제6여단장, 경기도 옹진지구전투사령관, 육군보병학교 초대교장,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 제3사단장을 역임하고, 1950년 4월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에 보직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부재중인 작전참모부장을 겸임하여 초기전투의 산파역할을 하였으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7월 12일부로 준장 진급을 한 김백일 장군은 동년 8월 제1군단장에 부임한 후, 경상북도 기계, 안강, 포항일대의 낙동강 최후 방어전투에서 북한군 5사단과 12사단의 공격을 저지, 포위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므로서 반격작전의 발판 구축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어 국군과 유엔군의 총 반격작전시에는 예하 3사단을 동해안지구로 진격시켜, 1950년 10월 1일 국군 최초로 38선 돌파작전을 감행하였다. 파죽지세로 북진을 계속하다가 동년 10월 10일 원산을 탈환하고, 김백일 장군은 10월 11일부로 소장으로 진급 하였으며, 제1군단은 계속적으로 북진작전을 전개하여, 함흥 탈환에 이어서 계속 진격하여 청진까지 점령, 동부전선 작전을 성공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탁월한 지휘 능력과 전공 그리고 투철한 군인정신이 높게 평가되어 근무 중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과 미국 은성훈장 및 공로훈장을 받았다. 그 후 김백일 장군은 중공군의 대공세에 대비, 작전 임무를 수행하다 1951년 3월 28일 미 제8군 작전회의에 참석한 후 군단 본부로 급거 복귀 하던 중 강원도 대관령 상공에서, 악천후로 인하여 타고 있던 항공기가 추락하면서 장렬히 전사 하였다. 연곡면 동덕리와 송림리를 잇는 백일교는 1950년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의 3·8선 최초 돌파를 기념하기 위해 56년 육군야전공병단이 길이 200m, 폭 6m의 목재 교량으로 건설했다. 이후 72년 콘크리트 교량으로 재설치했으나 지지축 4개가 크게 파손돼 철거 위기에 놓여 있던 것을 김백일 장군의 아들 김동명 장군과 육군철벽부대가 강릉 시청에 교량의 역사적 가치와 영구 보존을 적극 요청했다. 이에 따라 강릉시는 교량이 통행에 이상이 없도록 한 달 동안 교판·교각·난간 등 훼손된 부분을 보수하고 철골구조물을 도색하는 등 대대적인 보강공사를 거쳐 새롭게 단장했다.
백인기 장군 전사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48년
주제 : 기타
지역 : 전라남도 구례군
관할지청 : 전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보병12연대(연대장:대령 백인기)가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으로 구례중앙초등학교에 지휘본부를 두고 토벌작전을 수행중 작전사령부(남원)로 부터 지휘관회의차 긴급호출을 받고 호위병 2명과 함께 남원으로 가던중 구례 산동 시상리 사랑부락앞에서 공비들의 기습공격을 받고 마을 뒷산으로 피신중 공비들에게 포위되었다고 판단, 마을입구에서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함
백용성선사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남도 합천군
관할지청 : 경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백용성 선사는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 중 한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1만세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농장을 조성하는 등 독립운동가로서 그 공훈을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비석글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짓고(撰) 전(篆)은 역시 33인중 한 사람인 위창 오세창이 썼음을 비신의 우측면의 글귀로 알 수 있다. 해인사에서는 매년 삼일절날<다례제(茶禮際)>를 올리고자 계획하고 있다.
백석산지구 전투 전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1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강원특별자치도 양구군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송현리에 백석산 전투에서 산화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3군단에서 1958년 3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1951년 8월 18일부터 10월 28일까지 백석산에서 벌어진 전투다. 국군 제7사단 3연대, 5연대, 8연대, 제16포병대대, 제8사단, 미 제96야전포병대대와 북한 제12사단, 제32사단, 중공군 611연대가 이 전투에 동원되었다. 이 전투는 주저항선을 강화하기 위하여 국군이 양구 북방에서 제한된 공격 작전을 전개하여 백석산과 그 일대를 점령하였다. 8월 중순에 접어들고 장마가 그치자 유엔군의 하계공세라고 부르게 된 작전이 8월 18일부터 개시되었다. 미 제10군단장은 미 제2사단에게 피의 능선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위해서는 서쪽에 이는 554고지를 확보해야만 하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7사단에 554고지 공격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때 사단은 554고지 공격에 앞서 인근의 883고지와 901고지를 공격하였다. 3연대는 883고지를 공격하여 8월 18일에 탈취하였지만 북한군의 역습에 다시 철수하였다. 8월 20일 3연대는 밀리고 밀리는 격전 끝에 901고지와 883고지를 점령하였고, 5연대는 양갈래고지를 점령하였다. 8월 21일 다시 철수하였고 8월 25일 8연대와 전차공격대대는 536고지를 탈취하였다. 8월 31일 8연대 901고지 탈취, 9월 2일 전차공격대대 554고지 탈환, 9월 18일 3연대는 883고지를 탈환하고 백석산을 목표로 공격준비를 하였고 9월 26일 백석산 남동쪽1060능선을 탈취하였다. 8연대는 이날 백석산 좌측봉우리를 점령하였다 9월 28일 북한군은 제12사단으로 교대하였고 9월 30일 아군도 8사단으로 교체되었다. 10연대는 이날 백석산 좌측 봉우리를 점령하였으나 북한군에게 피탈당하고 10월 1일 백석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 결과 백석산을 점령하여 북쪽에 위치한 어은산 남쪽의 고지군 공격에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어은산 남쪽군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백석산 탈환을 노리고 있었다. 10연대는 1050고지를 6일동안 공격을 계속하여 10월 11일 마침내 고지를 점령하고 10월 15일에는 중공군을 격퇴하여 1130고지를 확보하고 다음 작전에 대비하였다. 한편, 16연대는 중공군과 접전을 벌인 끝에 백석산 서쪽 743고지, 650고지를 10월 12일에 점령하였다. 10월 13일에는 인근의 977고지를, 10월 16일에는 931고지를 점령하였다. 리리고10연대는 10월 28일 마지막 공격을 감행하여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1090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중공군은 어은산 방면으로 퇴각하고 10월 25일부터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백석한 일대의 전투가 종료되었고 이 전선은 휴전협정 조인 시까지 유지되다가 군사분계선으로 결정되었다. 적군 사살 1, 460명, 포로 101명이었으며 아군측도 전사 244명, 부상 1, 165명, 실종 14명에 이르렀다.
백곡3.1운동기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충청남도 청양군
관할지청 : 충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백곡리새마을회는 1985년 3월 1일 정산3·1독립운동에 참여한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 주민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 마을회관 옆에 백곡 삼일운동 기적비를 건립하였다. 기적비에는 백곡리 출신의 홍범섭 등 5명과 태형 90대를 받은 조종원 등 12명, 일경의 총칼에 중상을 당한 김필현 등 2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정산만세운동은 1919년 4월 5~6일간의 정사면 장날에 700여 명의 주민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운동을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다, 일경의 무력탄압에 많은 사상자를 낸 시위운동이다.
백범 김구 은거 기념관
시설 : 사당
사건 연도 : 1876년
주제 : 의열투쟁
지역 : 전라남도 보성군
관할지청 : 전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 비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제를 응징코자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898년 3월 9일 인천감옥에서 탈옥하여 이곳 쇠실에서 달포 여를 은거하며 동국사기를 가르치며 민족정기를 일깨웠다. 떠날 때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이별난시를 남긴 후 중국으로 망망하였고, 해방 후 귀국하여 쇠실의 집집마다 친필휘호를 써 보내 은거의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1990년에 주민들의 호응과 보성군의 도움으로 은거비를 세웠으나 내용이 빈약하여 2006년에 주민들의 숙원사업으로 은거기념관을 지을 것을 건의하여 전라남도의 후원 및 백범선생 기념사업회의 도움으로 기념관을 준공하였다.
백범 김구선생 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876년
주제 : 해외운동
지역 : 인천광역시 부평구
관할지청 : 인천보훈지청
시설내용 : 김구 선생은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주석으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 운동을 전개하는 등 항일운동의 최선봉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였고, 해방 후에는 국내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위해 힘썼다. 정부에서는 이와 같은 김구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처럼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주 평화통일에 몸 바친 민족의 지도자 및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이 인천에서의 수감생활과 인천축항공사 노역 등으로 인천과 연이 깊었던 점을 기릴 뿐만 아니라 김구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고자 했던 당시 교장선생님의 주도 하에 1980년 부평여자중학교 내에 백범 김구선생 상이 건립되었다.
백세각 항일의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말 4월 초 성주 지역 야성송씨 문중이 백세각에 모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파리장서) 서명과 성주지역 독립만세 시위 참여를 논의하고, 태극기와 격문을 준비하여 4월 2일 성주읍 장날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송준필(宋浚弼, 1869~1943), 송홍래(宋鴻來, 1876~1953), 송회근(宋晦根, 1877~1949), 송규선(宋圭善, 1880~1948), 송훈익(宋勳翼, 1884~1961), 송천흠(宋千欽, 1888~1968), 송우선(宋祐善, 1894~1942), 송문근(宋文根, 1895~1963), 송인집(宋寅輯, 1896~1961), 송수근(宋壽根, 1896~1969)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송명근(宋命根, 1912~1971)은 1931년 12월 대구에서 항일 반전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백세각항일의적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4년 10월 29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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