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 선택
서울
경기
충북
충남
강원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인천
대전
광주
대구
울산
부산
세종
전체 현충시설
독립운동 현충시설
국가수호 현충시설
닫기
닫기
현충시설 소개
현충시설 소개
국내 현충시설
전체 현충시설
독립운동 현충시설
국가수호 현충시설
국외 참전시설
국외 참전시설 둘러보기
현충시설 함께하기
현충시설 활용 우수사례
관리실태 신고
사이버 추모관
OPEN API
전체 현충시설
홈 > 국내 현충시설 > 전체 현충시설
전체 현충시설
독립운동 현충시설
국가수호 현충시설
MAP
HOME
TOP
BOTTOM
시설 전체
공원
기념관
기타
동상
비석
사당
사적지
생가
장소
조형물
탑
주제 전체
3·1운동
6·25전쟁
6·25전쟁 및 월남전쟁
기타
문화운동
민족주의운동
사회운동
애국계몽운동
월남전쟁
월남참전
의병운동
의열투쟁
학생운동
한말구국운동
해외운동
지역 전체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세종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지자체 전체
VR 영상
유
무
안내판
유
무
제목
내용
검색 결과
총 2316건
Excel
전체 개수 : 2316
애국지사 류인수 행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6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남도 합천군
관할지청 : 경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19.3.20 대병면 창리 장날을 기해 동지들과 함께 40,000여명의 군중을 주도하며 독립만세 시위를 벌인 뒤 주재소를 습격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른 공적이 있다.
애국지사 남정 이종희장군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9년
주제 : 민족주의운동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관할지청 : 전북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김제 금산면 출신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종희의 추모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중국 만주로 망명한 후 길림에서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1922년 3월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까〔田中義一〕을 저격하려다 실패하였다.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제4기로 졸업하고 상해와 남경 등지에서 항일투쟁에 투신하였다. 1938년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과 조선의용대 조장을 맡아 활약하였고 1942년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자 제1지대 총무조장과 제1지대장을 역임하였다. 1943년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전라북도 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하였다. 해방을 맞이하여 1946년 3월 귀국길에 배안에서 벙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87년 11월 23일 모악 향토문화연구회는 이종희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웠다.
애국지사 정한조선생 사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90년
주제 : 사회운동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관할지청 : 전북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김제 출신 애국지사 정한조의 사적비. 정한조는 1926년 이리청년회를 발기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이리지역의 여러 단체를 이리청년회로 결집시키는데 공헌하였다. 1925년 전북기자단의 일원으로 경찰비리를 도당국에 항의하였고 1927년 12월에는 이리의 언론기관을 비롯해 13개 단체 대표 30여명과 함께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조직하고 재만동포에 대한 비인도적인 처사에 대해 항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8년에 폭력방위 등에 대한 법률위반혐의로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징역 6개월 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와 군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에 정한조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1994년 10월 10일, 김제시에서는 정한조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애국선열 추모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2003년
주제 : 기타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관할지청 :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시설내용 : 일제강점기 제주지역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항일독립운동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건의 주도자들은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수난을 겪었다. 북제주군에서는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1997년 8월 15일 이 탑을 세웠다.
애국지사 이종희선생 생가
시설 : 생가
사건 연도 : 1889년
주제 : 민족주의운동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관할지청 : 전북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종희는 1890년 4월 19일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에서 태어났다. 미륵신앙의 혁명적 사상을 토대로 민족의식을 키워가다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들어가 항일투쟁에 헌신하였고, 1922년 3월에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을 저격하려다 실패, 그 후 1925년 광동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군 소위로 임관, 남창 주둔 국민혁명군 부대에 배속돼 근무하면서 의열단 남창지부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 간부학교 교관으로 한인 청년사관 양성에 힘썼다. 1936년 2월부터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일제요인 암살 등을 지휘하였고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으로 약산 김원봉 선생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이끌었고 이듬해 조선혁명간부학교 졸업생을 포함한 100여명의 정예요원들로 구성된 조선의용대 조직에 참여했다. 1942년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해 제1지대 총무조장으로 활약하다 1943년 김원봉 선생에 이어 제1지대장을 맡아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다. 이어 임시의정원 전라북도 의원으로 피선 조국 광복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해방을 맞아 1946년 3월 귀국길 배안에서 병이나 56세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임병직박사 생가
시설 : 생가
사건 연도 : 1893년
주제 : 해외운동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관할지청 : 대전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임병직 선생은 1895년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응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이승만의 비서로서 구미위원부에서 활약하면서 일황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 1921년 임시정부 외교부 참사 황진남과 유럽제국에 일본이 침략만행을 규탄하는 외교공세를 펼쳤으며 1943년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을 도와 한미외교 교섭에 기여하였다. 부여군에서는 임병직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2003년 11월 그의 생가를 복원하였다.
애국지사 청송 심공재현 기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94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남도 합천군
관할지청 : 경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심재현은 1919년 3월 20일 합천읍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체포된 독립지사 신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결사대를 이끌고 경찰서로 돌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정신을 기려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심재현선생의 얼을 되살려 후세들의 교훈으로 삼고자 제작된 기적비는 2000년 사업비 4천여만원을 들여 부지 25평에 높이 212cm 너비 1m로 제작됐다.
애국지사 김양수선생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96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라북도 정읍시
관할지청 : 전북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05년 최익현(崔益鉉) 의진을 결성하기 위한 모의에 참가하였으며,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작성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최익현이 동지 규합이 여의치 않아 실망하고 있을 때, 김양수는 고예진(高禮鎭)과 고석진(高石鎭), 그리고 고제만(高濟万) 등의 청년들과 정산(定山)에서 최익현에 호응하여 거사할 것을 함께 모의하였다. 이들은 격문을 작성하여 8도에 배포하고, 12월 충남 노성(魯城)에서 각지로부터 소모(召募)된 7백여 명과 함께 거의하였다. 또한 김양수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 작성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독립청원서는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이중업(李中業) 등의 영남유림과 김복한·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 등의 호서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이때 김양수도 유림대표 13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만초 남병우선생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4년
주제 : 민족주의운동
지역 : 경상남도 의령군
관할지청 : 경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남병우는 경남 의령출신으로 토지조사사업에 항거하여 투쟁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경남 의령군의 정곡면 중교동의 동쪽 일대의 토지는 주민들이 개간을 끝내고 지세를 납부하며 경작해오던 민유지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 지역을 국유지로 편입하여 멋대로 조선농업주식회사에 불하하였고 1914년 8월에는 해당지역의 측량을 강행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전중진, 남병우, 남상순, 이진우 등의 지역 유지들은 토지측량을 극력 저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700여 명의 주민을 모아 8월 26, 27일의 이틀에 걸쳐 경찰관의 입석하에 진행된 임시토지조사국원의 토지측량을 방해하였고, 이를 안내하던 박기양을 구타 응징하는 등 격렬하게 항쟁하였다. 남병우는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1915년 2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허당 명도석선생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5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관할지청 : 경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명도석은 1885년 4월 3일 마산에서 태어났다. 1907년 7월 설립된 마산노동야학교의 교사생활을 하였는데 이 학교는 조국의 현실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후진양성을 통해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설립한 민족학교로 무산층의 여자교육도 함께 하였다. 1919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같은 해 3월 12일 경남 마산의 만세시위를 추진하기 위해 최용규 등과 사전협의하여 3월 21일 마산 장날을 기해 거사를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거사 당일에는 군중과 함께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1920년 가을에는 박용만의 밀사와 중국 봉천성의 안동에서 만나 항일운동의 방향을 논의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1927년 7월 20일에 신간회 마산지회 설립대회에서 서기흥과 함께 정치문화부장을 담당한 것을 시작으로 1928년 12월 28일에 열린 2회 정기대회에서는 회장직을 맡았으며, 1929년 8월에 열린 ‘복대표대회 규약개정에 따른 임시대회’에서는 대회의 최고 의결권자인 집행위원장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또 양조장에서 운송업으로 사업을 전환한 이후 수송차량을 만주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단체에 은밀히 독립자금을 지원하는데 이용하였다. 그밖에도 옥기환 등과 함께 자력갱생을 위한 터전으로 만든 원동무역주식회사를 바탕으로,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부산의 백산 안희제와도 연락하면서 독립자금의 공급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의 창간주주로서도 참여하여 민족언론창달에 공헌하였다. 1940년대 일제가 소위 내선일체를 내걸고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창씨개명을 강요할 때도 그는 그것을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굳건히 지켰다.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
페이지 이동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