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 선택
서울
경기
충북
충남
강원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인천
대전
광주
대구
울산
부산
세종
전체 현충시설
독립운동 현충시설
국가수호 현충시설
닫기
닫기
현충시설 소개
현충시설 소개
국내 현충시설
전체 현충시설
독립운동 현충시설
국가수호 현충시설
국외 참전시설
국외 참전시설 둘러보기
현충시설 함께하기
나라 사랑 여행 코스
현충시설 활용 우수사례
관리실태 신고
OPEN API
전체 현충시설
홈 > 국내 현충시설 > 전체 현충시설
전체 현충시설
독립운동 현충시설
국가수호 현충시설
MAP
HOME
TOP
BOTTOM
시설 전체
공원
기념관
기타
동상
비석
사당
사적지
생가
장소
조형물
탑
주제 전체
3·1운동
6·25전쟁
6·25전쟁 및 월남전쟁
기타
문화운동
민족주의운동
사회운동
애국계몽운동
월남전쟁
월남참전
의병운동
의열투쟁
학생운동
한말구국운동
해외운동
지역 전체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세종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지자체 전체
VR 영상
유
무
안내판
유
무
제목
내용
검색 결과
총 2316건
Excel
전체 개수 : 2316
안동군청, 경찰서, 법원 3.1만세 운동지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관할지청 : 경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안동군민 3,000여 명이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를 벌이다 30여명이 순국하였다.
안동장터 3.1만세운동지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관할지청 : 경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현재 안동시 문화의 거리 일대인 안동장터에서 만진 이상동(석주 이상룡의 동생)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 만세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단독시위를 벌였다. 이 단독시위가 확산되었고 2천5백여 명으로 늘어난 사람들이 군청, 경찰청, 법원으로 몰려가 애국지사 석방을 요구하는 등 투석전을 펼쳤다.
안중근의사 동상(장성)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879년
주제 : 의열투쟁
지역 : 전라남도 장성군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상무대에 세워져있는 안중근의사 동상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순국한 안중근의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1973년 3월 5일 남산에 세워졌던 것으로 안중근의 동상이 남산에 재건되면서 기존에 있었던 것을 상무대로 이전한 것이다. 참군인의 표상이며 민족의 지도자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려던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민족의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단죄하고 순국하였다.
암태도 소작쟁의 기념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43년
주제 : 사회운동
지역 : 전라남도 신안군
관할지청 : 전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암태도 농민소작쟁의는 일제의 가혹해진 소작료 수취가 발단이었다. 당시 암태도의 지주 문재철은 평균적인 소작료는 50% 정도를 훨씬 넘는 60~80%에 이르는 소작료를 요구했다. 청년 서태석, 서창석 등은 1923년 말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하고 소작료를 조정하였다. 그러나 문재철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소작료 납부 거부와 함께 협상을 시도하던 중 경찰 고소와 고발, 구속 등으로 이어졌다. 소작인회는 13명의 구속석방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기 시작하면서 쟁의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섬주민 500여 명이 목포법원 마당에서 단식농성을 하자 이에 서울·평양 등 전국적으로 지원하는 강연회와 지원금을 모금하였다. 한국인 변호사들은 무료로 변호를 자청하면서 파문이 계속 확산됐다. 이에, 마침내 일제는 더 이상 문제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남도청과 무안군청 쪽도 문재철을 설득하여, 결국 타협안 6항(1항, 소작료 40%, 10%는 농업장려금 외 5항)이 마련되었다. 이 중재로 인하여 쌍방간의 고소를 취하하면서 구속자들은 집행유예와 벌금형으로 풀려났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섬주민들의 강고한 단결력과 지속적인 투쟁으로 전국적 반향을 불러일으켜 다른 소작쟁의에 큰 힘을 불어넣어주었다는 의의를 갖는다. 암태도 소작인 항쟁을 기리는 기념탑인 암태도 소작쟁의 기념탑 비석에는 소설 '암태도'를 쓴 송기숙 선생의 글이 새겨져 있다. 그날의 투쟁을 증거하는 글이다. 1998년에 암태면사무소 옆 부지 4백여 평에 높이 7m, 폭 1.2m의 크기로 건립된 이 기념탑에는 소작인 항쟁사와 항쟁에 참여했던 농민 4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애국지사 성곡 서병무선생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1919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서병무 애국지사의 공헌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건립 <애국지사 성곡 서병무선생> 1919년 4.2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대구형무소에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만주와 일본 등지로 망명하였다가 상해로 건너가 독립공채모금운동에 종사하다가 1923년 서석연선생이 투옥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사업에 헌신하면서 여생을 마침
애국지사 최정학선생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남도 의령군
관할지청 : 경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의령읍 및 부림, 신반리 독립만세 시위 주동 인물로 활약하여 1990년 애족장으로 서훈되신 최정학 애국지사님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독립유공자 및 유족, 지역민의 자금심을 고취하고자 의령군은 2018년 4월 21일에 이 비를 건립하였다.
애국지사 함양박공의연·의열·의훈 사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0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관할지청 : 경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상해 임정의 국내 조사원으로 경북 의성에서 조사 활동을 하였으며 재만독립촉성회를 결성하는데 북만 대표로 활동한 박의연 지사, 1912년 만주에서 부민단이 조직되자 중앙검찰장으로 활동하고, 1919년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통의부 통화 검찰감, 정의부 부교, 동원학교 교장을 역임하는 등 항일활동하다 순국한 박의열 지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통의부와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박의훈 지사 등 3명의 애국지사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애국지사 백당 신태윤선생 동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884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곡성군 곡성읍
관할지청 : 전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신태윤은 1884년 6월 15일 담양군 남면 외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한학을 배우다가 1904년 창흥의숙에서 신식교육을 받고 광주농업학교와 관립한성사범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8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 곡성보통학교의 훈도로 취임하게 되었다. 한일합방이 되자 국운을 회복하기 위하여는 민족정기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일념에서 단군숭모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1914년 삼인동에 단군전을 건립하여 밤중에 춘추로 개천절과 승천일인 어천절에 제향을 모시면서 곡성에서 뜻을 같이 하는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대규모의 3·1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1919년 곡성에서 장날인 3월24일을 기하여 만세운동을 조직하였다. 그 일로 신태윤은 경성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을 확정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이감되었다. 대구교도소에서 출소한 그는 1923년 서울로 이사하여 장훈학교에 취직하고 역사책 《정사》를 발간하였다. 1925년 경북 성주군 성산면 고산동으로 내려가 초산학교를 세워 육영에 힘썼다. 이후 전남 장성, 순창 등으로 옮겨다니며 단군숭모운동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펼쳤다.
애국지사 정진감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년
주제 : 해외운동
지역 : 전라남도 함평군
관할지청 : 전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애국지사 정진감은 1940.9월 유학목적으로 일본을 건너가 1942.5월 중순경 한국독립청년당을 결성하고 중학생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43.3.2.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 6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애국지사 남촌 곽경렬선생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관할지청 : 전북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곽경렬은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1915년 어린 나이로 항일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일본 헌병대 무기 탈취, 친일 부호 처단, 군자금 모집 등 활발한 항일운동을 펼쳤다. 1916년 일본경찰의 체포망을 피하여 한때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계속 활동하였다. 1918년 친일파 이종국이 광복단조직을 밀고함으로써 재차 체포망이 압축되자 지하로 은신하였다. 1920년 전라북도 옥구군 대야면에서 군자금모금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4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6년 전주지방법원에서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도에 건국포장을 수여 하였다.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
페이지 이동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