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 선택
서울
경기
충북
충남
강원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인천
대전
광주
대구
울산
부산
세종
전체 현충시설
독립운동 현충시설
국가수호 현충시설
닫기
닫기
현충시설 소개
현충시설 소개
국내 현충시설
전체 현충시설
독립운동 현충시설
국가수호 현충시설
국외 참전시설
국외 참전시설 둘러보기
현충시설 함께하기
현충시설 활용 우수사례
관리실태 신고
사이버 추모관
OPEN API
전체 현충시설
홈 > 국내 현충시설 > 전체 현충시설
전체 현충시설
독립운동 현충시설
국가수호 현충시설
MAP
HOME
TOP
BOTTOM
시설 전체
공원
기념관
기타
동상
비석
사당
사적지
생가
장소
조형물
탑
주제 전체
3·1운동
6·25전쟁
6·25전쟁 및 월남전쟁
기타
문화운동
민족주의운동
사회운동
애국계몽운동
월남전쟁
월남참전
의병운동
의열투쟁
학생운동
한말구국운동
해외운동
지역 전체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세종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지자체 전체
VR 영상
유
무
안내판
유
무
제목
내용
검색 결과
총 2316건
Excel
전체 개수 : 2316
애국지사 정화암선생 사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96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관할지청 : 전북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1920년에는 미국 의회의 사절단이 내한하였을 당시, 일본의 침략상과 일본의 학정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자 1921년 10월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부터는 상해에서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과 교유하며 조국의 광복운동은 무력투쟁의 방법에 의하여 쟁취하여야 한다고 판단, 폭탄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방안을 강구하였다. 1928년에는 안공근(安恭根)·이정규(李丁奎)·한일원(韓一元)·이을규(李乙奎) 등과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고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맹하여 활동하였으며, 기관지 "탈환(奪還)"을 발행하여 무장항일 투쟁을 촉구하였다. 1930년 4월에는 신현정(申鉉鼎)·최석영(崔錫榮) 등이 천안의 호서은행에서 5,700원의 자금을 가져오자 유자명(柳子明)·이 달(李達)·이하유(李何有)·오면직(吳冕稙)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 상해부(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上海部)를 조직하였으며,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무력항쟁을 도모하였다. 또한 중국내 무정부주의자의 거두인 유기석(柳基石)을 비롯하여 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활약하던 중 1931년 1월 4일 원심창(元心昌)이 동경에서 북경을 거쳐 상해에 오게 됨을 계기로 이중현(李中鉉)·유자명(柳子明)과 함께 조직을 좀더 강화하고 상해 등지에서 친일배와 전향자(轉向者) 등을 색출하여 암살 대상으로 지목, 결정하고 동지들에게 실천하게 하였으며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구성원으로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B.T.P)을 조직하여 일본영사관과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1933년에는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백정기(白貞基)·유기문(柳基文)·이용준(李容俊)·진수방(陳樹芳)·전화민(田華民) 등 간부들을 규합하여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동년 3월 17일에는 일본 주중 상해공사(日本駐中上海公使)인 유길명(有吉明)이 중국의 유력인사 100여 명을 무창로(武昌路) 육삼정(六三亭)이라는 일본요리집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원심창(元心昌)·이강훈(李康勳)·백정기(白貞基)에게 권총 2자루와 폭탄 1개, 수류탄 4개를 주고 육삼정 부근 송강춘(松江春)이라는 중국 음식점에서 유길명(有吉明)이 나오는 것을 대기하던 중, 일본 밀정의 밀고에 의하여 거사 직전에 백정기·이강훈 등이 체포되었다. 1936년 1월부터는 남화연맹의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매월 발간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맹혈단(猛血團)"이라는 별동대를 조직하여 무력투쟁을 하도록 하였고, 1937년 9월에는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를 규합하여 "중한청년연합회"를 결성하는 한편, "항쟁시보(抗爭時報)"를 발간하여 한·중 양국민의 공동투쟁을 도모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시책에 협조하여 임정을 지원하였으며, 1940년부터는 이 강(李剛)·신정숙(申貞淑)·전복근(全福根)·강치명(姜治明) 등과 함께 상해 방면에서 잠복, 활동하며 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서 주중 미공군에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하는 등 정보활동에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강근호선생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8년
주제 : 의열투쟁
지역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관할지청 : 부산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강근호(姜槿虎, 1888~1960)는 1916년 함흥중학교 2학년 때 학생사건으로 수배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3월 13일 용정촌에서 3·1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만주 군정서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1921년에는 자유시 전투에 참전하고, 고려혁명군 사관학교 교관으로도 근무했다. 1943년에는 만주 명월구 애국동지회 청년군사훈련 교관으로 활동했다. 육군 제53사단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2000년 4월 13일 이 비를 세웠다.
애국지사 고석주 선생 흉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관할지청 : 충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애국지사 고석주 선생의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애국지사 고석주 선생은 1919년 3월 대한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해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2017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애국선열 추모비(철원)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기타
지역 :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철원군민들이 철원군에서 3·1운동 직후 결성된 철원애국단 단원들의 구국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1967년 3월 1일 철원군 철원읍 화지8리 54(철원고등학교 교정)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조직적으로 추진하고 지원하기 위해 대한독립애국단이 조직되었다. 1919년 철원 출신 김상덕은 애국단에 가입하고 강원도 조직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8월 11일 강대려·김완호·이용우·이봉하·박건병·오세덕 등은 도피안사에 모여 대한독립애국단 철원군단(철원애국단)을 결성하였다. 철원애국단의 활동이 도내 각지로 확대되어 나갔으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철원의 부호가 이를 경찰에 밀고하여 1920년 초 관계자 전원이 체포되었다. * 애국선열추모비가 위치한 철원역사문화공원의 철원읍 사요리 일대는 강원도에서 3·1운동이 먼저 일어난 장소로 철원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으로 2023.12.7. 철원중·고등학교에서 이전되었다.
애국지사추모탑(비)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민족주의운동
지역 : 충청남도 태안군
관할지청 : 충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대한독립단은 1919년 음력 3월 남만주 유하현에서 조맹선·백삼규·조병준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로, 국내 진입작전과 남만주 동포사회의 자치를 목표로 했다. 실제 이들은 주로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지역, 만주 등지에서 항일무장활동을 벌였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집중적으로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남북도의 조선총독부 경찰을 습격하고, 신의주 등지에서 친일세력을 처단하기도 했다. 대한독립단 안면결사대는 1919년 9월 조직되었고 이종헌이 지단장에 선임되었다. 이들은 군자금 모집, 친일 부호 응징 등 독립활동을 하다가 1920년 일경에 노출되어 단원들이 체포되고 조직이 해체되었다. 지단장 이종헌(1977년 애족장)을 비롯해 가재창(1982년 애족장), 오몽근(1982년 애족장), 김정진(1983년 애족장), 염성환 등이 옥고를 치렀다. 태안 안면 반도청년회는 1983년 8월 대한독립단 안면결사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애국지사 추모탑을 건립하였다.
애국지사 연병호선생 생가
시설 : 생가
사건 연도 : 1894년
주제 : 해외운동
지역 : 충청북도 증평군
관할지청 : 충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연병호는 1894년 11월 22일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중명학원을 수료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연길시 창동학원, 그리고 북경시 중국대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일제에 의하여 주권을 강탈당하자 그는 25세가 되던 해인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 난징, 상하이 등지로 전전하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국내에 있던 임시정부를 후원하기로 하고 동지 송세호와 함께 입국하여 1919년 5월 이병철, 조용주 등과 비밀항일운동 단체인 대한독립청년외교단을 조직,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임시정부에 정보제공 등을 목표로 활약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출옥 후 다시 상하이로 탈출하여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9년 말에는 한국국민당을 발기 조직하였으며, 1934년 신한독립당을 조직하였다. 1935년 한국민족혁명당으로 발전 조직하였다. 또한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1935년 10월까지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많은 활동을 하던 중 일제 앞잡이인 상해거류조선인 회장 이갑녕의 저격사건이 일어나자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던 중 1937년 1월 7일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으며, 징역8년형을 받고 공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광복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준비위원회 영접부장이 되었으며, 1945년 제헌국회의원과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애국지사 순흥 안찬복지사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97년
주제 : 3·1운동
지역 : 부산광역시 남구
관할지청 : 부산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평안남도 안주읍 3·1독립운동을 주도한 안찬복의 추모비. 안찬복은 1919년 3월 3일,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하여 평남 안주읍 율산공원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날 모인 5,000여명의 군중을 이끌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으며 대형 태극기와 악대를 선두로 하여 시가행진을 하였다.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헌병경찰의 무차별 사격을 받아 시위현장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안찬복은 체포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으며 출옥 후에는 요시찰인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2년 10월 5일에 학교법인 원곡학원은 그의 애국행적과 독립정신을 추모하고자 동천고등학교 교정에 이 비를 세웠다.
애국지사 백당 권영조 선생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3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관할지청 : 경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권영조는 경남 창원 사람으로 1910년부터 창원에서 애국유지로서 사립경행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기여하여 왔다. 1919년 3월에 3·1독립운동이 발발하자 권영대·변상섭 등과 이 지방의 거사를 의논하고, 거사일을 다가오는 고현 장날로 약정하여 태극기를 만들고 선전격문을 쓰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등 거사준비를 갖추어 가는 한편 각 면·동으로 다니면서 동지와 대중규합에 노력하였다. 약정한 3월 28일의 장날 오후 1시경이 되자 예측대로 많은 장꾼이 모여들었고 권영대의 선창과 지휘 아래 장터 곳곳에 대기중인 동지들이 일제히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서 독립선언서와 선전격문을 살포하였다. 그는 500여명의 주민과 함께 시위를 주동하다가 이해 3월 28일 오후 5시경 진동헌병주재소 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해 5월 2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선생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하다.
애국지사 박희광선생 동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905년
주제 : 의열투쟁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박희광은 항일 의병운동가인 윤하공의 다섯째 아들로 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에서 태어났다. 1912년 항일 의병활동으로 인해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자 부친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18세 되던 해인 1922년 그는 만주에서 결성한 임시정부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에 자진 입대하여, 특공대원으로써 활약하였다. 1924년 박희광은 임시정부로 부터 만철연선의 친일파를 토벌 하라는 특명을 받고, 김광추, 김병현 등과 3인조 암살 특공대를 결성하여 이들의 숙청작업을 하였다. 1924년 6월 1일에는 무순방면의 고등계 첩자이며 여순조선인회 서기인 악질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현장에서 사살하였다. 1924년 6월 7일 대낮에는 보민회를 습격하여 친일파 거두 최정규를 암살하려 하였으나 최정규가 미리 피신하여 그의 부하 허 윤과 가족을 사살하였다. 1924년 7월 22일에는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지급받은 폭탄을 봉천 일본총영사관에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했다. 같은날 저녁에 일본 고관들이 출입하는 고급요정인 금정관에 침입하여, 거액 군자금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잠복한 중국, 일본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김병현과 체포되었다. 박희광은 1924년 대련지방법원에서 1심에 사형을 받았으나, 1927년 여순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형이 확정되어 여순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일본천황 즉위 때와 황태자 출생 때에 감형되어, 20년을 복역한 1943년 43세의 나이로 출옥하였다. 그 후, 대련에서 동지 이성갑, 유하도와 함께 중국 충칭으로 옮겨간 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주목과 감시를 피해다니다 임시정부에 합류하지 못한채 1945년 만주에서 광복을 맞았다.
애국지사 국오 황만영선생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75년
주제 : 문화운동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관할지청 : 경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황만영은 경북 울진 태생으로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늑결 후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향리에 주둔 하고 있던 성익현 의진에 군자금 8백 냥을 지원하면서 의병활동을 격려하였다. 그 후 1907년 신민회가 창건되자 회원으로 가입하여 향리인 사동에 대흥학교를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2년 만주로 망명한 그는 이시영 등과 함께 유하현 삼원보에 설립된 신흥학교의 재정을 담당하였으며, 1913년에는 노령 지역으로 건너가 그곳의 독립운동자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3 1운동이 일어나자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에 참가하였던 그는 1919년 9월 주진수 등과 함께 만주로 파견되어 순회 강연을 개최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한편 그는 1925년 정의부 독판 이상룡이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하기 위해 길림에서 상해로 갈 때, 동행하여 임시정부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5년 8월에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에 들어와 1927년 신간회가 성립되자 신간회 울산지회 회장에 선임되어 민족협동전선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
페이지 이동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