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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16
애국지사 일표 조용관선생 흉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년
주제 : 사회운동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관할지청 : 전북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익산 함라마을은 1900년 초 개화기 때 만석꾼으로 이름을 날렸던 삼부자 고택으로 유명하다. 옛 담장을 따라 산책을 하다보면 함라면사무소 옆 함라초등학교가 나타나고 교정에 들어서면 바로 애국지사 일표 조용관 선생의 흉상을 만날 수 있다. 조용관 선생은 1885년 함라에서 태어나 1920년대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자도자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이다. 1925년 1월 군산민중운동자동맹 사건으로 징역 8월을 받고 군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다시 노동운동계에 뛰어들어 1926년 10월 군산철도노동회 위원장, 1927년 3월 군산노동연맹회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동년 5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에서 임시의장으로서 회의진행을 주관하다가 체포되었다. 동년 9월에는 조선노동총동맹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29년 3월 조선공산당 전북도당을 결성한 혐의로 체포되는 등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후 조용관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 그 애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동창회, 유족 등이 뜻을 모아 2008년 생전 설립에 힘을 쏟았던 함라초등학교 교정에 흉상을 건립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2015년 5월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애국지사 백아 이정기선생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98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이정기는 1898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김복한 등 전국의 유림 대표 137명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탄원서를 작성, 김창숙을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하고자 상하이로 보냈으나 파리로 가지 못하고 탄원서만 우송된 파리장서사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장서의 서명자 가운데 한 사람인 송회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이정기 역시 체포되어 고초를 겪은 뒤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베이징에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출판사를 설립해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는 한편, 김창숙·남형우 등에게 무기 제조법을 익힌 뒤 1925년 9월 대구로 가서 이원록 등과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데 주력하였다. 1928년 1월 대구은행 폭탄투척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 2년간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애국지사 국간 김철호선생 공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01년
주제 : 사회운동
지역 : 경상남도 통영시
관할지청 : 경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김철호(金哲鎬, 1901~1950)는 1926년 8월 중국 광동(廣東) 중산대학에 재학 중 김원봉(金元鳳)·오성륜(吳成崙)의 권유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선전출판부의 책임을 맡았다. 국내 활동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귀국한 그는 1927년 신간회 통영지회에 가입하여 총무간사와 서무부의 일을 맡아 활동하다가 1929년 10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같은 해 12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사단법인 가학중앙종친회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1995년 11월 이 비를 세웠다.
애국지사 원인 이호철선생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01년
주제 : 민족주의운동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관할지청 : 대전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이호철은 충남 부여 출신으로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휘문학교학생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활동하였다. 1923년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에 재학당시 재일동포를 규합하여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인식시키고 민족정신의 앙양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6월 부여군 홍산면을 위시하여 각지의 부락에 농민들을 위한 야학과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농민계몽에 주력하다가 1933년 8월 10일 피체되었다.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선생 동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901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관할지청 : 전북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군산 출신 독립운동가 이인식의 동상. 이인식은 1919년 2월 28일 정동교회구내 이필주 목사 집에서 3·1독립운동을 계획할 때 보성중학교 대표로 참석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3월 5일에는 남대문역 광장에서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며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월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20년 8월에 전재산을 방매하고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8,000원을 헌납하였다. 1923년 일본 동양대학에 입학하여 유학생 단체인 금우회를 조직하고 월보를 간행하며 항일운동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비밀리에 국내로 잠입하여 정보수집과 군자금 조달책으로 활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이인식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2005년 10월 1일 이인식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 동상을 세웠다.
애국지사 천세헌선생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1년
주제 : 해외운동
지역 : 경상북도 문경시
관할지청 : 경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천세헌은 1902년 서울에서 외국어학교에 다녔으며, 1903년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1910년 다시 뉴욕으로 옮겨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회에 가입하였다. 1914년에는 흥사단에서 활동하였으며, 1917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방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자유한인대회가 열리자 여기에 참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 외교사무소 설치 등을 결의하였다. 그 뒤 서재필 등과 함께 뉴욕에서 대한민족대표단 후원회를 조직하고, 특연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대한민족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 상해로 파견된 그는 안창호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발전에 노력하였다.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1940년 7월 강영승과 함께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시카고지방지회를 설립하였다. 1942년부터는 각종 독립금과 기성금을 출연하여 조국의 독립전쟁을 후원하는 등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1945년 6월 서거하였다.
애국지사 국사 오화영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오화영(吳華英, 1880~1950 납북)은 1917년 서울 종교교회에 부임하여 담임 목사로 시무하던 중 1919년 3월 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의 일인으로 참여하여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7년 2월 5일 신간회 창립에 참여하여 간사로 활약하였고, 1930년 5월에는 물산장려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활동했다.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검속되었다가 9월에 풀려났다. 고창오씨종친회는 그를 기리기 위해서 1988년 5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애국지사 성계 김경성선생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79년
주제 : 문화운동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관할지청 : 경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김경성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도덕리 출신으로, 김중탁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1919년 3월 24일 김천군 개령면에서 일어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김경성은 1919년 10월경 개인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하였으며, 서간도 지역에 설립된 신흥 무관 학교에 입학하기를 희망하는 청년 3명을 모집하여 인도하였다. 1920년 2월 다시 경주지방에서 군자금 및 신흥무관학교 학생모집을 위하여 활약하다가 피체되어 1921년 4월 14일 대구 지방 법원 경주 지청에서 소위 공갈 및 보안법 위반죄 명목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6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애국지사 백은 최재화교사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92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구미시(전 선산) 해평면 출신 독립운동가 최재화를 추모하는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학산되어 가던 중인 1919년 4월 3일, 최재화는 산양리, 송곡리, 금호리 주민 60 ~ 70명을 이끌고 해평면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5월 8일에는 경북도내의 조선인 관리의 사직을 권고하는 인쇄물을 배포하고 애국청년들을 모집하여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교시키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 일로 경상북도 경찰 제3부에 제령위반 혐의로 송치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1920년 7월에 상해로 망명, 궐석재판에서 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의열단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구미시에서는 1966년 5월 6일에 최재화의 애국정신을 기리어 이 비를 세웠다.
애국지사 정남균선생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29년
주제 : 학생운동
지역 : 전라남도 완도군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정남균은 전남 완도 사람이다. 광주농업학교 재학중 1926년 11월 3일, 당시 광주 부동정 소재 최규창의 하숙방에서 왕재일·장재성 등 광주고보와 농고생 15명과 함께 조국의 독립·사회과학 연구·식민지노예교육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를 조직하였다. 동회의 운영은 월회비 10전, 매월 제1·3토요일에 모여서 민족적 교양의 함양과 사회과학을 통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연구하기로 정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비밀엄수, 동지포섭으로 조직 확대에 힘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1927년 3월 회원중 이반자가 생겨 기밀누설의 위험이 있었으므로 그의 집에서 회의를 갖고 동회를 해체하였다. 그러나 동회의 해체는 형식적이었을 뿐으로 주동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나갔다. 동년 3월 졸업 후에도 계속 모교 독서회와 연락하다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시위 후 성진회 운동과 관련하여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후 1930년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며,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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