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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231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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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16
신의면 현충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전라남도 신안군
관할지청 : 전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조국수호를 위해 6.25전쟁 및 월남전 등에 참전하여 신명을 바치신 신의도 출신 국가유공자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신석구 사택 터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0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서울특별시 중구
관할지청 : 서울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신석구는 충북 청주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태어났다. 15세때 고향을 떠나 방랑생활을 할 때 친구 김진우의 전도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1908년 정식으로 전도자의 길을 가게 되었는데 1918년에는 서울 수표교 교회에 파송 받아 목회하는 중에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27일 기독교 측 대표들이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때 신석구도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3월 1일 명월관 지점에 모일 때도 참여하여 독립선언 후 체포되어 2년 반의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1921년 11월 4일 출옥 후에는 목회에 임하였다. 천안교회의 목회 중에는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일으켜 믿음을 지키도록 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중형을 받아 중한 병을 얻고 석방되었다. 그 후 1939년 일제의 신사가 없는 평남 용강군 신유리교회, 유사리교회, 문애리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45년 5월 전승기원 예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용강경찰서에 연행되어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신돌석장군 생가
시설 : 생가
사건 연도 : 1878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관할지청 : 경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신돌석은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명은 돌석, 태흥, 태을, 대호이며 태백산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이듬해 19세의 어린 나이에 10여명의 동지들을 모아 영해 의병진을 창군, 활약하다 1896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해산했다. 1905년 11월 을사5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체결되어,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06년 3월 장군도 영릉의병진을 창군하니 그 때 장군의 나이 29세였다. 장군은 최고 30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상남북도, 강원도, 충청도에 걸친 넓은 지역에서 항쟁한 의병장이기도 했으나, 일월산, 백암산, 대둔산 등지에 요새를 두고 소수정예로 적을 섬멸하는 게릴라전에도 능했다. 그러나 1908년 11월 18일 부하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어 3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신돌석 생가는 본래 초가집으로 부친 신석주가 1850년경에 지었는데 일본 관헌들이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꺾기 위해 1940년에 불태워버렸다. 이후 1942년에 일부를 새로이 세워 기와집으로 꾸몄다가 1995년 초에 현재와 같은 초가집으로 복원되었다.
심산 김창숙선생 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해외운동
지역 : 서울특별시 서초구
관할지청 : 서울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대가면(大家面) 칠봉동(七峰洞)에서 김호림(金頀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의 이름은 창숙이지만 우(愚)라고 개명한 일도 있다. 자(字)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이지만 일제에 피수(被囚)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아서 앉은뱅이가 되어 벽옹이란 별호(別號)도 붙었다. 성품이 곧아서 평생을 불의·부정·불법과 타협하는 일이 없었으며 누구에게나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규탄을 서슴지 않았다. 심산은 어려서부터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장석영(張錫英) 등으로부터 유학을 배웠으며,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으로부터 시작되는 주리설(主理說)도 전수 받았다. 이러한 성장 과정으로 인하여 심산은 일찍부터 성리학자로서의 길을 닦았다. 그러나 서구근대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된 개화(開化)와 외국의 것으로부터 내 것을 고수하자는 척사(斥邪)가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어지게 되고 동시에 외세(外勢)와 저항이라는 사회변혁 속에서 전통적 유학자의 길에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을 지킬 수 있는 구국부민(救國扶民)으로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심산의 항일독립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인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5적소(請斬五賊疏)라는 을사5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는데서 시작하였다. 그는 이 일로 말미암아 성주경찰서에서 8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옥 즉시 그는 이승희와 함께 시베리아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노모를 두고 떠날 수 없다는 효심(孝心) 때문에 중단하고 계속 국내에서의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나라의 빚을 갚고 자립경제를 함으로써 일본을 물리치자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시작되자 그는 이 일에 앞장서서 활동하였으며,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성주지부(星州支部)를 결성하여 총무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으로는 유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향리에 사립학교인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워 민족주의교육을 하였다.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韓日合倂論)을 제기하자 심산은 고향인 성주에서 유림들을 모아 이들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건의서를 연서(連署)로 작성하여 중추원(中樞院)에 제출하고 각 신문에 발표하였다. 이 일로 그는 일경(日警)에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마침내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이 침탈되자 나라를 잃었다는 생각으로 그는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오로지 성리학만을 공부하였다. 그의 학문적 실력은 이때 닦아졌다. 그는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하기 직전인 2월에 총총히 상경하여 민족대표에 유림계(儒林界)가 빠진 것을 통분하며 거족적인 민족운동에 유림계도 적극 참여할 것을 다짐하였다. 다른 기회에 참여키 위하여 그는 영남·호남·호서의 유림중진을 설득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인 장서(長書)를 작성케 하였다. 이 장서는 그 이외에도 이중업(李中業)·곽대연(郭大淵)·유준근(柳濬根)·김 황(金榥) 등 유림대표 137명이 연서(連署)에 날인하였다. 인쇄되어 국내의 각도 향교 등에도 배포되었으며 원본은 심산이 동년 3월말 휴대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프랑스로 우송케 하였다. 이 결과 제1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침체되었던 유림계는 한말구국을 위한 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중국으로 망명한 심산은 상해에서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신규식(申圭植)·김 구(金九) 등과 함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조직하였다. 이에 1919년 4월 25일 임시의정원 제3차회의의 결의에서 도지역별 의원을 선출하는 위원회를 개최, 4월 30일부터 열린 제4차회의에서 심산은 김정묵 등과 함께 의정원 경상도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동 5차회의에서 그는 교통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부의장직에도 당선되어 구국활동을 위해 혼신을 다하였다. 한편 심산은 그의 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중화국민당(中華國民黨)의 손 문(孫文)을 비롯하여 오 산(吳山)·서 겸(徐謙)·장병린(章炳麟) 등과 교통하여 한·중공동 항일 운동을 추진토록 하였다.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한국독립후원회(韓國獨立後援會)의 조직이 바로 그것이다. 광동의 중국공교회원(中國孔敎會員)인 임복성(林福成)과 교유하면서 그곳 중의원(衆議院)에 나가 연설한 바도 있었다. 따라서 그곳 광동에는 한국독립운동 후원회가 조직되었다. 1920년에는 상해에서 임복성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사민일보(四民日報)를 창간하였으며, 천진(天津)에서는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독립운동기관지 천고(天鼓)를 간행하였다. 1923년 1월 민족의 단합을 위하고 임시정부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자대회(國民代表者大會)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참석자들이 창조파(創造派)와 개조파(改造派)로 양분되었고 이때 심산은 창조파의 국민의회대의원으로 추대되었으나 참가하지 않았다. 구국항쟁의 일념에 있던 그는 이때 민족운동의 분열을 우려하여 참가치 않았던 것이다. 1925년 이승만(李承晩) 임시대통령의 위임통치(委任統治) 주장이 문제되자 그는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과 이를 성토·탄핵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파면시켰다. 한편 국내외적 변화에 따른 임시정부의 광복운동이 침체하자 심산은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李會榮)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서 동삼성(東三省) 일대에 한인교포들을 모아 집단거주지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산업의 추진,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하여 국내로 진입하는 독립전쟁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중국국민당과의 교섭으로 만몽(滿蒙) 접경지에 황무지 3만 정보(町步)를 무상 조차하였고 이의 개간자금 모집을 위해 1925년 8월 그는 김화식(金華植)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 경기·충청·경상지역에서 유림과 부호를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전개했으나 계획대로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그는 국내에서의 잔학한 일제 식민지통치 아래 점차 상실되는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방법으로 결사대(決死隊)를 파견, 각종 식민지기관을 파괴하기로 하였다. 1926년 이동녕·김 구·김원봉(金元鳳) 등과 상의, 1차로 의열단(義烈團)의 나석주(羅錫疇)를 파견하여 1926년 12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폭파케 하였다. 국내의 유림들도 그를 도와 모금운동을 하였고 이에 600여 명의 유림이 투옥하는 제2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하였다. 1927년 5월 심산은 병으로 상해 공동조계(共同租界)에 있던 영국인 병원 공제의원(公濟醫院)에 입원 중 일본 밀정에 발각 붙잡혀 국내로 압송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4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변호도 공소도 거절한 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이때 심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다. 광복 후인 1946년 그는 전국 유림을 결속시켜 유림재단을 정리한 후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육영사업을 목적으로 성균관(成均館)과 성균관대학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강인한 정신은 반민족 반민주적인 독소를 제거키 위해 전환되었다. 즉 1951년 독재정권인 이승만대통령에게 하야 경고문(下野警告文)을 내어 부산형무소에 또다시 투옥되었다. 출옥 후 1952년 2·4정치파동 때 국제구락부사건(國際俱樂部事件)을 주동하여 재차 투옥되는 등 그의 민족을 위한 불굴의 의지는 지속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하였다. 저서에 자서종요(字書綜要)와 벽옹70년회상기 등이 있다.
심산 김창숙선생 동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879년
주제 : 민족주의운동
지역 : 경기도 수원시
관할지청 : 경기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김창숙은 성주군 대가면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대궐 앞에 나아가 청참오적소를 올려, 역신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다. 1906년 말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그는 전국단연동맹회 성주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채보상기금을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1908년 대한협회의 지부를 성주 향사당에 설치하고, 봉건적 신분질서의 청산과 그를 통한 전민족적 구국운동을 주장하였다. 특히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통감 이등박문의 사주를 받아 한일합병론을 제기하자 그는 성주의 유림들을 모아 연명으로 일진회와 매국노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일로 성주 주재 일본군 헌병분견소와 경찰주재소에 피체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였다. 1919년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김창숙은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에 송부하는 한편, 각국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보냈다. 또한 한인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해외각지에도 보냄으로써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3·1운동 이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공헌하였고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하자,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 등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 동삼성 일대에 재만 한인동포들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이곳에서 산업을 육성하고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으로 양성한 뒤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전쟁 방략을 추진하였다. 나석주 의거를 도왔고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지내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1926년 12월 27일에는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건에도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갔다. 그런 와중 신병으로 상해 병원에 입원 중에 일경에 피체되어 대구경찰서와 형무소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던 중 선생은 일경의 고문과 장기간의 수형생활로 다리를 못쓰게 되고, 병이 위중하여 1934년 9월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였고 해방 직전에는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7일 피체되어 왜관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심산 김창숙선생 동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879년
주제 : 민족주의운동
지역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할지청 : 서울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김창숙은 성주군 대가면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대궐 앞에 나아가 청참오적소를 올려, 역신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다. 1906년 말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그는 전국단연동맹회 성주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채보상기금을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1908년 대한협회의 지부를 성주 향사당에 설치하고, 봉건적 신분질서의 청산과 그를 통한 전민족적 구국운동을 주장하였다. 특히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통감 이등박문의 사주를 받아 한일합병론을 제기하자 그는 성주의 유림들을 모아 연명으로 일진회와 매국노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일로 성주 주재 일본군 헌병분견소와 경찰주재소에 피체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였다. 1919년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김창숙은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에 송부하는 한편, 각국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보냈다. 또한 한인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해외각지에도 보냄으로써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3·1운동 이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공헌하였고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하자,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 등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 동삼성 일대에 재만 한인동포들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이곳에서 산업을 육성하고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으로 양성한 뒤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전쟁 방략을 추진하였다. 나석주 의거를 도왔고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지내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1926년 12월 27일에는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건에도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갔다. 그런 와중 신병으로 상해 병원에 입원 중에 일경에 피체되어 대구경찰서와 형무소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던 중 선생은 일경의 고문과 장기간의 수형생활로 다리를 못쓰게 되고, 병이 위중하여 1934년 9월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였고 해방 직전에는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7일 피체되어 왜관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심일소령 위령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강원도 영월군
관할지청 : 강원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강원도 영월군 북면 마차리 마차초등학교 내에 6·25전쟁 당시 육탄공격을 감행한 심일 소령을 추모하기 위해 영월군청년회의소에서 1998년 10워 15일 이 비를 세웠다. 심일 소령은 함경남도 단천군 출생으로 서울대학교를 2년 수료하고 육군사관학교 4기로 입학, 1949년 5월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춘천에 배치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당시 제6사단 7연대 대전차포대 2소대장으로 남하하는 북한군의 SU-76 자주포가 아군의 대전차포를 맞고도 포탄을 쏘아대며 계속 전진해오자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해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의 포탑 위로 돌진하는 육탄공격을 감행한 끝에 북한군 자주포 3대를 격파하는 전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전공 사실은 순식간에 전군에 전파되어 북한군의 전차 및 자주포에 대한 공포심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으며 모든 전선에서 육탄공격으로 적의 전차를 파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울러 그의 영웅적인 행동은 개전 초기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켜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국제연합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 공로로 중위에서 대위로 1계급 특진되었으며, 이후도 충청북도 음성군, 경상북도 영천군 등지의 전투에서도 참전했다가 1951년 1월 26일 제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있던 중 강원도 영월군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사후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1계급 특진하여 소령으로 추서되었다.
심호섭선생 독립만세 고창유지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91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관할지청 : 경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 비는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심호섭이 다수의 수곡면민을 창촌 무실장터에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 8월 15일에 진주시 수곡면 창촌리 670에 건립되었다. 심호섭 선생(1891∼1935)은 3·1운동 당시 수곡면장을 지내면서 진양군 수곡면 토곡리에 거주 중에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를 털어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1919년 3월 22일 수곡면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이해 5월 20일 보안법 위반으로 1년여의 옥고를 치렀으며, 1926년경에는 일본의 도쿄·나고야 등지를 무대로 친일한국인 단체인 상애회(相愛會)와 근로조합을 상대로 투쟁하였다.
심일공원
시설 : 공원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강원도 춘천시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용산리 102보충대 입구에 제6사단 7연대 소대장으로 춘천대첩의 신화를 창조한 심일 소령을 추모하기 위해 춘천대첩선양회에서 2000년 6월 25일 공원을 조성했다. 심일 소령은 함경남도 단천군 출생으로 서울대학교를 2년 수료하고 육군사관학교 4기로 입학, 1949년 5월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춘천에 배치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당시 제6사단 7연대 대전차포대 2소대장으로 남하하는 북한군의 SU-76 자주포가 아군의 대전차포를 맞고도 포탄을 쏘아대며 계속 전진해오자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해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의 포탑 위로 돌진하는 육탄공격을 감행한 끝에 북한군 자주포 3대를 격파하는 전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전공 사실은 순식간에 전군에 전파되어 북한군의 전차 및 자주포에 대한 공포심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으며 모든 전선에서 육탄공격으로 적의 전차를 파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울러 그의 영웅적인 행동은 개전 초기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켜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국제연합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 공로로 중위에서 대위로 1계급 특진되었으며, 이후도 충청북도 음성군, 경상북도 영천군 등지의 전투에서도 참전했다가 1951년 1월 26일 제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있던 중 강원도 영월군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사후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1계급 특진하여 소령으로 추서되었다.
심산 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879년
주제 : 민족주의운동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김창숙은 성주군 대가면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대궐 앞에 나아가 청참오적소를 올려, 역신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다. 1906년 말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그는 전국단연동맹회 성주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채보상기금을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1908년 대한협회의 지부를 성주 향사당에 설치하고, 봉건적 신분질서의 청산과 그를 통한 전민족적 구국운동을 주장하였다. 특히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통감 이등박문의 사주를 받아 한일합병론을 제기하자 그는 성주의 유림들을 모아 연명으로 일진회와 매국노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일로 성주 주재 일본군 헌병분견소와 경찰주재소에 피체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였다. 1919년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김창숙은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에 송부하는 한편, 각국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보냈다. 또한 한인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해외각지에도 보냄으로써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3·1운동 이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공헌하였고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하자,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 등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 동삼성 일대에 재만 한인동포들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이곳에서 산업을 육성하고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으로 양성한 뒤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전쟁 방략을 추진하였다. 나석주 의거를 주도하였고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지내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1926년 12월 27일에는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건에도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갔다. 그런 와중 신병으로 상해 병원에 입원 중에 일경에 피체되어 대구경찰서와 형무소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던 중 선생은 일경의 고문과 장기간의 수형생활로 다리를 못쓰게 되고, 병이 위중하여 1934년 9월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였고 해방 직전에는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7일 피체되어 왜관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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